오늘 모임에 나눈 무거운 주제에 대해 너무 무겁고 큰 주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구원이란 무엇인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에 필요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너무 지루하게 나눈 것은 죄송하구요...나누어드린 프린트는 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체계를 세우는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나는 지금 영적으로 어디에 서 있는가?" 또는 "나는 구원받은 자인가"하는 진지한 고민과 함께 성경에서 가르치는 정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청년의 시기는 빠르게 지나고 세월은 짧고도 덧 없습니다. 청년의 시기를 너무 놀고 즐기는 일에만 집착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더욱 크리스찬은 "다르게" 살아야합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도 지금의 고민과 문제가 주님안에서 발견되어 기쁜 크리스챤의 모습으로 만나뵙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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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두란노, 2001)
<차례>
1.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3.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4.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5.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6.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7. 예정과 지키심
부록 / 예수는 어떤 메시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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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
구원(redemption)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악과 고난에 짓눌려 있는 인생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죽음’(롬 6:23)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죄의 대가로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꼭 죽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에는 인간의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올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의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의 발로의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인간이 그의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를 스스로에게 닫아버렸더라고 그는 자신의 속에 있는 제한된 자원에 의해 얼마 동안은 계속 존재합니다.
사탄은 피조물을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되고 자 하는 의지’ 곧 자기주장을 하려는 의지를 갖도록 항상 충동질합니다(창 3:5). 우리는 여기서 ‘인본주의’ 곧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포하고 인간성을 만물의 척도로 삼으며 인간이 스스로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고취하는 사상이 바로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도록 유혹했던 뱀의 ‘사상’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그리고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인간의 본질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실존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2.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대지로부터 뿌리 뽑혀 땅에서 분리된 나무가 제한된 양분으로 살다가 죽듯이, 인간은 100년이라는 짧은 세월을 마치면 죽고 맙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고 환상입니다. 인류 문명에 대한 낙관론 같은 것들은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낙관론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최고로 ‘발달’된 과학과 기술은 인간을 최대로 ‘파멸’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바로 인간의 계발된 지성 혹은 인간의 계발된 지혜가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죄악을 초래하였습니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애초부터 구원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힘이 와야 합니다. 우리 밖의 무한한 힘을 가진 초월자로부터 우리를 위해 오는 것이어야만, 즉 오직 은혜로 올 때 우리 인간에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제한된 자원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구원을 이루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3.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20세기 전반부 세계 신약학계에 군림한 불트만은 예수의 역사적인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더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다고 증명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구약의 두 예언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니엘 7장 13절 이하와 이사야 53장입니다.
예수님은 다니엘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종말에 창조하는 사명을 가지셨는데,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의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여 대속적 죽음을 죽음으로 죄사함을 이루고 새 언약을 세움으로써 그 사명을 성취한다고 보셨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나타낸 자기 이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도 일치합니다. 죄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주권에서 떠나 자기 안에 체현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라는 선포는 곧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여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창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대로 인류의 죄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예수님이 옳았다’라고 선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 곧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다.” “예수가 곧 구원자다”라는 깨달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를 위해(우리의 죄를 위해)죽었다”라는 선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공식적인 선포가 된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내용들은 인간의 지혜로 깨달은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이 아닙니다.
4.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해석의 성경적 범주들
신약 성경은 크게 네 가지 중요한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십자가에 나타나 구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祭祀), 화해(和解), 구속(救贖), 새언약(新言約)입니다.
5. 하나님의 구원의 주관적 적용
믿음의 요소에는 첫째로 앎의 요소, 둘째로 의지하는 요소, 셋째로 순종하는 요소, 넷째로 소망하는 요소, 다섯째로 두려워하는 요소 등이 있다고 합니다. 믿음의 본질적인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복음의 구원론적 정의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을 극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세계입니다. 세례를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극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관적인 구원 사건을 네 가지 그림, 의인 됨(의인 됨이란 말은 법정에서 온 그림입니다.) 화해함(화해함이란 인간관계에서 온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하나님의 아들 됨은 가족 관계에서 오는 그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그림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 죽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했다는 구원의 실재를 나타냅니다.)등입니다.
구원의 실재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제한된 자원 속에 갇혀 죽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끌어다 씀으로써 신적인 삶에 참예하는 삶이 곧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6.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다고 합니다.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롬 5:1; 8:1).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살전 1:10). 이것은 바로 기독교의 독특한 종말론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사탄이 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인 죽음을 꺾은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아직 (아직)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는 자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잘 못된 믿음입니다. 또한 내일 종말이 온다고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불안해하는 것도 옮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다는 사실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성령입니다.
믿음에 윤리를 내포하지 않은 이것이 한국 교회의 문제가 아닌가합니다. 믿음은 있다고 하나 윤리가 없습니다. 윤리를 내포하지 않는 믿음은 구조상 헛것입니다. 고난은 믿음이 실재화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믿음에서 일어난 옛 죄에 대한 벌 받음. 옛 죄인의 죽음. 사건이 실제 생활에서 펼쳐지는 실재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도는 믿음의 종말론적 구조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제자도란 말이 한국에서 잘 쓰이지 않는데, 이것인 믿음이 미신화 된 가장 큰 증상입니다. 고난의 삶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한 새로운 삶으로 날로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이 됩니다.
숙규 형제야!
내가 믿는데로 자네 열심히 노력하고 있구나
자네는 분명히 자나님께서 도우셔서 크게 쓰임 받으리라 믿어내 내 중고등때 교회 친구 중에 자네처럼 순진무후한 녀석이 있었는데...그녀석 너무 순진하고 얼빵해서 어떻게 시대적응은 잘하겠나 했지만 오르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서 마침내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도구가 되고 말았단다
미국 유명 음대 마치고 음악박사 학위 받고 한세대 음대에서 학과장에다 주요 보직에까지 올라갔단다
언제나 우린 하나님안에서 뭐든지 할수 있어!
기도하면 날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고 말이야
우리 자네를 안잊을께
기쁜 소식 가끔 올려다오
이만 안뇽~~~